벼락맞은 나무

7.2 스포일러

 

 

 

꽝하고 세상이 흔들렸다. 강렬한 빛과 찢어지는 굉음, 몸을 관통하여 사라진 벼락의 잔상이 몸뚱이 생생하게 남았다. 저릿한 손끝으로 바닥을 짚은 모험가가 홧홧한 숨을 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고막이 거의 찢어질 뻔하였으니 먹먹하게 소리가 묻혀 상황 파악이 남들보다 늦었다. 누군가 말하고 있음에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나마 익숙한—그러나 한 번 죽여 없앴던—구둣발이 코앞을 휘적거리며 걸어 다녔다.

“우리는 너한테 중요한 볼일이 있거든! 맡겼던 물건을 찾으러 왔어! ‘세계를 잇는 힘’을 제어하는 열쇠… 당연히 돌려줄 거지?”

이 무슨 자다가 얼음물 맞는 소리야. 통증 때문인지 어이가 없어서인지 미간을 찌푸린 모험가가 헛웃음을 뱉으며 시뮬런트를 올려다보았다. 사지의 마비가 덜 풀려 일어나기도 여의찮은 것이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돌려달라니. 내가 왜?”

“‘열쇠’만 넘겨주면 5000명뿐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을 영원인으로 만들어서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데…?”

그럼 더 많은 사람의 뇌를 통속에 담아서 전기자극을 주는 게 행복한 일인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더 많은 영원인을 위해 더 많은 학살을 저지르겠다는 선언인가? 선전포고? 원초세계와의 전쟁을 원하나? 비슷한 감상이긴 마찬가지였는지 우크라마트가 큰소리로 받아쳤다.

“헛소리 집어치워! 영원인을 위해서 또 에테르를 빼앗겠다는 거야!?”

“모든 건 ‘그 사람’의 실험을 위해서야! 예전의 나에게 영원인을 만들게 한 것도 그 일환이거든. 그 아이, 참 안됐었지…. 끝도 없이 늘어나는 사망자들을 전~부 영원인으로 만들라니. 애초에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잖아.”

중얼중얼, 시뮬런트가 가증스럽게 말을 잇는 와중에 모험가는 손을 주억거리며 신체 기능을 점검했다. 등이 따갑고 홧홧한 것이 제대로 지져진 모양이었다. 드레싱을 하고 치료할 필요가 있겠어…. 반사적으로 급한 대로 에테르를 감았음에도 별반 소용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미 몸뚱이가 종잇장만도 못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만.

“하지만 사실 그것도 다 계획된 거였어! 궁지에 몰린 그 아이가 ‘열쇠’를 회수해서 사용하기를 처음부터 기대하고 있었거든!”

“목적이 뭐야?”

천천히 몸을 일으킨 모험가가 물었다. 너무 평범한 어조인 탓인지 대답은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화면 너머에서 바쁘게 손을 움직이던 인물이 되물었다.

“…혹시 나한테 묻는 거야?”

대답하지 않을 것 같더니 그는 태연하게 목적을 늘어놓았다.

“새로운 ‘진화’를 위해서야.”

그것이 진짜 목적인지는 알 수 없으나, 표면적인 목적이긴 했다. 연극을 하듯이 느릿한 손짓과 목소리가 간단한 사전 실험 설명을 하듯이 이어졌다. 모험가는 굳이 얼굴을 보이지도 않는 상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아주 먼 옛날, 생명은 변해가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죽음’이라는 것을 터득했지. 말하자면 세대교체라는 생존 전략인 거야. 낡은 것, 약한 것은 죽음을 통해서 배제되고, 종은 시대에 적응하며 최적화를 이루지….”

시뮬런트는 그가 말하는 와중에도 얌전히 자리를 지켰다. 동맹인가, 아니면 보조인가. 주(主)와 부(副)가 나누어진 관계인가. 마치 차례를 지키려는 듯이 시뮬런트는 생글생글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방식은 한계야. 고루하기 짝이 없다고. 번식에만 의존하니까 대책 없이 숫자만 늘지. 그 결과 자원이 부족해져서 시시한 전쟁 따위를 일으키는 거야. 게다가 죽음이라는 종지부를 찍으면서 얼마나 많은 가능성이 사라지게 됐지?”

학살을 원하는 자들은 어째서 부연 설명이 길고도 많을까.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합리화겠지. 모험가는 구태여 타인에게 의도를 설명하여야만—그것이 정말로 타당성 검증이 가능한 주장인지는 차치하고라도—인정받을 수 있는 급진적 계획이 과연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가늠해 보려다 관두었다.

“…이 지경에 이른 인류에게, 육체라는 족쇄는 비합리적이야. 우리는 ‘영원한 보전’을 지향해야 해.”

평면으로 된 화면 너머에서 일방적으로 말하는 상대에게 의미 있는 토론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의 이름과 정체를 안다고 해서 두 집단 사이의 기울어진 정보의 불균형이 해소되지도 않는다. 그는 마치 하늘에서 모든 것을 굽어보는 듯이 굴었다. 아. 모험가는 깨달은 듯이 작게 탄성을 뱉었다.

“우리 쪽 요구는 ‘열쇠’를 돌려받는 것…. 아주 단순해. 넘겨줄 마음이 없다면 그만한 각오는 해두는 게 좋을 거야.”

거스러미처럼 남은 의문을 묻어두고서 시뮬런트가 그들에게 남긴 경고를 곱씹었다.

“돌려달라니… 전제부터 잘못되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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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

백룸에 들어서자마자 그라하가 달려들듯 마중 나왔다. 모험가는 저도 모르게 뒤로 반걸음 물러섰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실토해야 할 것 같았다.

“기습을 당했다고 들었는데, 무사해서 다행이야….”

“아…. 응. 괜찮아.”

“혹시 어디 아프거나 불편하면 무리하지 마, 알았지?”

“응.”

사실 제대로 후처치도 안 했다. 아모는 눈을 굴리려다 라하와 시선을 맞추고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미심쩍은 듯 그라하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지만, 당장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이야기는 들었어. 프레저베이션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구나.”

모험가는 먼저 운을 떼준 쿠루루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눈을 돌렸다. 칼릭스의 목표가 무엇인지 추측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당장 중요한 것은 그가 사회 전반을 흔들어 무너뜨리려 한다는 점이다.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공포를 심어주고 혼란을 야기하여… 무엇을 얻으려 하건, 그의 행위를 저지하는 데에 있어 하등 의미 없는 탐색이다. 그에 앞서, 셰일이 발견한…정확히는 칼릭스가 의도적으로 흘린 흔적을 추적하여 언더킵으로 향해야했다.

“친절하게 단서까지 남긴 걸 보면 칼릭스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다친 곳은, 정말 괜찮은 거지?”

“처치 해뒀어.”

“네가 그렇다면, 난 믿어야겠지만….”

유능한 치유사인 모험가의 솜씨를 의심하지는 않으면서도, 그라하는 그의 성향을 아는만큼 마음을 놓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모험가는 대충 거즈로 감싸고 치유술이나 적당히 퍼붓다 말아 아물지도 않은 등의 상처가 따끔거리는 기분이 들어 눈을 피했다.

“승강기가 도착했어요. 바로 출발하시면 됩니다.”

“좋아. 어서 출발하자!”

승강기에 오르는 모험가를 그라하가 붙들었다. 뒤로 바짝 붙은 라하가 작게 속삭이며 그를 지나쳐갔다.

“아모. 나중에 다시 얘기해.”

등줄기를 타고 오른 건 소름인가 아니면 죄책감인가…. 모험가는 난감하게 미간을 문지르며 일행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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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무거운 부기사단장의 기체를 뒤로하고 스펜이 뛰쳐나갔다. 시뮬런트와 칼릭스의 시선이 그 아이에게로 향했다. 모험가는 말없이 두 사람을 응시했다.

“젤레니아와의 기억을 이렇게 이용하다니… 이런 식이라면 난 네 생각에 찬성할 수 없어.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의 소중한 기억을 너한테 맡길 수는 없다고!”

“나도 이런 식으로 연구 성과를 사용하고 굳이 시간과 수고를 들이게 돼서 유감이라니까?”

대화의 의지도 없고, 차라리 통보에 가깝다. 저들은 상대의 의견을 구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알다시피 난 아주 먼 옛날에 육체를 버렸어. 거기 계신 영웅님이 얌전히 ‘열쇠’를 내놓지 않는 이상, 쓸 수 있는 방법은 닥치는 대로 써보는 수밖에 없다고.”

스펜에게 열쇠가 있었다면 강제로 탈취한 후 제멋대로 가동했을 테지만, 소유권이 이전된 상대가 무력으로 강제 탈취가 불가능해지니 자꾸 이리저리 길을 꼬아놓는다. 소년이 턱을 치켜들었다.

“그 ‘열쇠’만 있으면 다른 거울 세계를 개척해서 거기서 수확한 양분으로 더 많은 영원인을 만들 수 있어. 그러면 우리 ‘제9세계’의 인류뿐 아니라 원초세계 사람들에게도 ‘진화’할 기회가 주어지지.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아?”

“그러니까…”

질문의 방향이 자신에게 돌아오자, 모험가는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들었다. 대답을 원하는 건가? 진심으로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아모는 목덜미를 긁으며 한숨처럼 말을 늘어놓았다. 어차피 그는 들을 생각도 없겠지만, 이런 발화는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누가 진화를 할지, 어느 시점의 어느 시대의 어느 세계일지도 다 네가 정할 거고? 뭐, 다른 사람들은 다 가축과 다름없는 지능으로 보여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 별로 동의는 못 하겠지만…. 최소 400년인가. 네가 영원인으로 산 세월이.”

발화가 쌓일수록 모험가는 머리꼭지에서부터 서서히 기름이 흘러내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은 손에 무엇도 묻어나지 않았으나 꼭 뜨뜻미지근한 무언가가 신경을 점령하는 것처럼….

“어리고 어리석구나, 너는.”

가려지지 않은 왼쪽 눈동자가 짙은 녹색으로 빛났다. 사람의 홍채가 본디 그러한 빛을 내지 않으니, 연구자의 손이 멈추었다. 칼릭스는 미간을 찌푸리고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반응 따위야 모험가의 알 바가 아녔다. 아모의 머릿속에 번쩍거리는 섬광 사이로 수많은 문장이 스쳐 갔다. 툴라이욜라, 알렉산드리아, 메라시디아, 아지스 라, 알라그, 노르브란트, 엘피스, 아모로트….

“그래. 선왕이 원초세계를 침범한 것도 다 너희 계획이었다면, 다른 세계와의 관계를 모르기도 어렵겠지. 아씨엔…역시 에메트셀크인가. 하여간 걔도 별짓을 다 해놨다니까.”

낮고 느리게 흘러가던 목소리가 중첩되듯 두 갈래로 갈리어졌다가 다시 합쳐졌다. 그는 오른쪽 눈을 가린 채 한 쪽 눈으로 연구자를 응시했다. 확정적인 어조로 말한다. 가장 먼저 잘못 전제된 것.

“그건 처음부터 내 것이었어.”

그의 왼손이 비어 있어도 모두가 그 위에 마땅히 놓여야 할 것을 떠올렸다. 열쇠, 혹은 주홍빛 크리스탈. 그의 자격을 증명하는 것. 처음부터 ‘돌려달라’는 명제는 그릇된 것이다. 모험가는 명백하게 주인이 있는 물건의 소유자라 참칭한 자들에게 말했다.

“너희에게 빌려주었던 것을 이제야 돌려받았는데 아직도 필요하다고 떼를 쓰면 안 되지…. 애초에 나는 너희에게 이런 짓을 하라고 빌려준 것이 아니었, 아…. 그래.”

갈라져서 겹쳐 들리던 목소리가 천천히 잦아들며 감겨가던 눈이 번쩍 뜨였다. 오른손을 내리니 녹색 눈 대신 청록의 홍채가 빛을 내었다. 스펜이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모험가는 한 걸음 나아갔다.

“네가 바라는, 네가 원하는 영원은 뭐야? 영원해지는 방법을 알려줄까? 시간대를 하나 고르고 영원히 그 구간을 반복하는 거야. 그러면 영원할 수 있지.”

“궤변은 그만두지. 이런 말로 시간을 허비하다니, 유쾌하진 않네.”

“궤변이라고? 제대로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영원은 불변이야. 변화하는 것은 영원할 수 없어. 네가 그토록 원하는 가능성은 영원을 변질시키고 끝내 낙원을 종말로 이끌지. 인류를 영원한 족속으로 만들겠다는 것도, 넌 인류의 개념적 진화를 원하는 것이겠지? 미움도, 다툼도, 시기와 질투도 없이 오직 아름다운 가능성만이 남은 세계를 꿈꾸나? 아닐 거야…. 넌 그렇게 이상주의자가 되지 못해. 어쭙잖게 현실적이어서 이상과 현실을 타협하지 못하고 있어.”

“수다는 여기까지…”

“영원한 것은 변화하지 않아.”

시뮬런트의 중재마저 썩둑 자른 모험가가 점차 빨라지는 어조로 말했다. 미간을 찌푸린 칼릭스가 펜을 쥐고서 모험가를 응시했다. 들어볼 요량인가. 관심도 없으면서? 모험가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정체되어 있지. 어느 한순간의 시점에 멈춰서 늙지도 죽지도 않지만, 새로이 태어나지도 않아. 네가 바라는 영원을 유지하기 위해선 끊임없이 자원을 소모해야만 하고, 그 자원의 사용량을 늘리지 않으려거든 새로운 탄생과 유입도 없어야 해. 그러나 현대의 인류는 그러한 삶을 견뎌낼 수 없어…. 그럼 너는 ‘도태되어 죽음을 원하는’ 사람들을 버리고, 영원에 적응한 사람들만 남겨둘 거야? 네 기준에 맞춰 사람을 죽임으로써 넌 또다시 타인의 가능성을 잘라내었는데도? 어쩌면 넌 그것도 대의를 위한 희생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라…. 결국 너 역시 현대 인류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단 증거고.”

숫제 경전을 외는 것처럼 말이 쏟아졌다.

“오욕칠정을 다 버리고서 인간을 초월한 다음에, 네가 바라는 이상향이 뭘까…. 넌 인류에게 더 나은 삶을 주려는 게 아니야. 네 실험이, 네 가설이 옳았다는 걸 증명받고 싶은 거지. 그 과정에서 인류가 진화한다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너의…베풂으로. 얼마나 오만하고 어리석은지.”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모험가는 기실 답을 알고 있다. 일찍이 가능성의 싹이 잘리어져 억울하였는가? 그리하여 죽음에서 완전히 벗어나 어떠한 불필요한 소모도 없이 영생을 사는 법을 얻고 싶어졌나? 영생을 바라는 자에게는 욕망이 있고, 욕망은 끝내 영생을 멸망으로 이끈다. 태생이 모순적이고 불완전한 인간인 이상 그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모험가는 그가 뭍으로 끌려 나와 펄떡거리는 물고기처럼 보였다. 아가미 대신 허파로 호흡하고 싶은가. 고래가 되어 오랜 세월에 걸쳐 영원에 가까워지고 싶은가.

“말해 봐, 네가 원하는 영원은 뭐야?”

“수다는 이쯤에서 끝낼까?”

시뮬런트가 끼어들어 다시 말을 끊었다.

“네가 찬성을 하든 말든, 우리가 뿌린 씨앗은 벌써 싹을 틔웠어. 이 나라의 모두가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게 됐거든. …그러니까 내 역할도 여기서 끝이야. 행운을 빌게, 칼릭스.”

“칼릭스.”

모험가가 다시 그를 불렀다. 그는 대답 없이 시선을 주었을 뿐이다. 미소 지은 모험가가 대수롭지 않은 듯이 말했다.

“사실 진짜 궁금해서 물어본 건 아니니까 대답하지 않아도 돼. 재밌으니 어디 끝까지 해보렴. 네가 날 이기면 다시 한번 빌려주마.”

“…계측을 하게 해줬으니 너한테도 ‘성과’를 줄게. 이거 가져가.”

두 사람은 그대로 사라졌다. 불 꺼진 알현실 옥좌에 선왕의 왕관만 덩그러니 남았다. 스펜은 젤레니아의 기체를 바라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의 명예와 충의를, 소중한 기억을 지켜줘서 정말 고마워….”

모험가는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기회가 보이니 흥분했던 탓에 머리가 뜨거웠다. 척추를 타고 흐르는 듯한 홧홧한 감각도 이내 사라졌다. 스펜은 그런 모험가에게 조용히 물었다.

“…정말로 그들이 이기면 넘겨줄 생각이야? 물론,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만….”

“어차피 내가 쓰러지면 강탈당할 물건이긴 해.”

“그런 의미는 아니었어.”

“알아.”

관도 백성도 잃은 왕이 쓸쓸하게 바닥의 흐려진 문양을 응시했다. 모험가는 커다란 부기사단장의 기체를 둘러보듯 걸으며 운을 떼었다.

“운명의 흐름이라는 게 있어. 어떤 것은 원하지 않아도 찾아오고, 어떤 것은 아무리 원해도 얻을 수 없지.”

“…그건 네가 넘겨주는 것이 운명이라는 뜻이야?”

“아니. 반대지. 나는 아직 패배해선 안 되니까.”

“아직….”

말을 곱씹듯이 되풀이하는 스펜의 곁으로 돌아온 모험가는 그 어깨를 단단히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위(位)를 잃은 왕과 눈이 마주쳤다. 아주 오랜만에, 예언가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모험가는 카드를 뽑지도 않고 미래를 점치듯 눈을 감았다가 이내 심상을 날려버렸다. 가벼이 웃음을 흘리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에게 대의는 없어, 스펜.”

“…그럴까.”

“적어도 그가 타인을 위하여 움직이고 있진 않아. 그는 누구보다 높은 곳에서 사람의 영혼을 장난감 화폐처럼 다루고 있지. 그리고 스펜, 확실히 하도록 해.”

“아모!”

멀리서 내달리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문이 열렸다. 아모는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며 몸을 바로 세웠다.

“내게 도움을 요청하는 건 상관없어. 필요하다면 기꺼이 도울 수 있고. 하지만 흐름을 멈추려면 네가, 선왕의 자리를 대체해야 해.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기다릴 만큼 시간 여유가 없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아둬. 너도 제법… 각오 해둬야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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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모험가의 앞을 그라하가 막았다. 백룸에서 각자 해산하려던 사람들은 두 사람을 보더니 그라하의 표정에 이내 고개를 돌렸다. 또 둘이 무언가 할 이야기라도 있는 모양이지. 가뜩이나 언더킵에서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기계 병사들이 날뛰는 통에 모험가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진땀을 빼고 온 참이었다.

줄곧 모험가의 동세를 살펴보던 그라하가 기어이 그를 붙잡자 익숙하게 모험가의 눈짓이 무시당했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그라하가 그의 정기 검진을 담당하다보니 다들 당연하게 굴었다. 끝이 흔들리는 목소리로 모험가가 물었다. 대답은 뻔했지만, 도망갈 구석이라도 없는가 하는 무의미한 시도였다.

“…왜?”

“휴게실에 좀 가자.”

아모는 케이지에 들어가는 동물처럼 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그라하가 이끄는 대로 백룸 너머의 휴게실로 향했다. 뒤에서 영문을 모르는 굴루쟈가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모험가님 혼나러 가요?”

“…음. 비슷해.”

떨떠름하게 뒷모습을 보던 쿠루루가 대답했다. 그라하의 표정이 심상찮은 것이, 또 모험가가 무언가를 제대로 말하지 않았구나…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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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게실 안쪽으로 들어선 그라하가 모험가를 침대 위로 밀었다. 떠밀리듯 순순히 침상에 앉은 모험가가 도통 시선을 마주하질 못했다. 팔짱을 낀 붉은 머리 미코테가 꼬리를 휘적거리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아무래도 들킨 모양이지. 모험가는 바짝 마른 입을 애써 축이며 간신히 변명하듯 운을 떼었다.

“라하, 그…”

“상처. 제대로 치료한 거 맞아?”

“그으… 렇긴 한데,”

“내가 봐도 될까?”

말투만 상냥하지, 눈빛은 영 아니었다. 찌르는 시선에 고개를 숙인 모험가가 점점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자, 정수리 위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움찔 떨리는 어깨 위로 부드럽게 손을 얹은 그라하가 단호하게 말했다.

“…보여줘.”

“응….”

치렁치렁한 겉옷 안의 셔츠는 직전의 전투로 핏자국이 남았다. 어쩌면 그의 상처에서 난 것일 수도 있겠다. 미간을 찌푸린 그라하는 슬그머니 벗어내린 셔츠 아래로 잔뜩 일그러지고 우글거리는 형태로 남은 오래된 흉터를 눈으로 훑고 대충 감아 흘러내리기 직전인 붕대 아래에 시선을 두었다.

“…드레싱을 왜 하다 말았어.”

“해, 했어.”

“상처가 다 덧났는데?”

“그건 전투 때문에….”

“거짓말.”

모험가의 입이 꾹 다물렸다. 그라하는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애써 정정하지 않고 한숨을 삼켰다. 솔루션 나인이 잠시 방전될 정도로 전류를 끌어다 벼락을 내리쳤다고 했지. 상처는 예상보다도 훨씬 크고 심각했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죽었거나 죽기 직전이었을 것이고, 단련된 전사라면 적어도 중상은 입었을 것을 경상처럼 넘긴 것도 ‘빛의 전사’라는 타이틀이나마 있기에 가능한 수준일 테다.

아프면 무리하지 말라고 해도 괜찮다고만 하지. 이러니 안심하고 놔둘 수가 없다. 그라하는 어깨 아래까지 자라 부스스하게 삐죽삐죽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등이 잘 보이도록 목덜미를 눌렀다. 굳이 힘을 주지 않아도 모험가는 순순히 몸을 숙였다. 다 벗지도 않아 팔에 걸친 셔츠가 길게 늘어져 등허리까지만 보였어도 상처를 살피기엔 충분했다.

“일부러지? 왜… 상처를 덧나도록 놔둔 거야?”

“…그읏, 아, 아파.”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귀까지 홧홧해진 모험가가 붉어진 얼굴을 숙이고 어물거렸다. 거즈와 붕대를 떼어내고 다시 소독하는 과정에서 통증으로 모험가의 꼬리가 바짝 섰다. 싫다는 소리나 저항 한번 없는 것이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그의 취향을 재차 상기시켰다. 미간을 콱 구긴 그라하는 한숨을 느리게 뱉었다. 낮아진 목소리가 숫제 수정공 시절이 떠오를 만큼 딱딱했다.

“아픈 게 좋아?”

“….”

“그렇다고 상처를 제대로 드레싱도 안 하고 덧나게 방치해?”

“그, 그래서가 아니라….”

억울하긴 했는지 모험가가 고개를 들고 작은 저항을 했다. 치료에 방해되지 않게 뒤통수를 누르자 다시 푹 고개를 숙이면서도 항변하듯 우물거렸다.

“통… 증이라도 조금 있어야, 전투할 때 집중하기 편해서….”

“즐기는 거야? 전투 중의 고통을?”

“그, 그런 건 아니고. 제대로 치유술을 돌리면 졸리잖아…. 아직 상황이 다 정리가 안 됐는데 태평하게 잠들면 안 되지. 내, 내가 그렇게 상황 못 가리고… 그럴 정도로 정신 나간 건 아니야….”

모험가는 변명을 늘어놓으면서도 그라하가 믿지 않으리라 여겼는지 자꾸만 곁눈질로 힐끔거렸다. 피와 진물로 지저분해진 솜과 거즈를 치운 그라하가 새 붕대를 들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전부야?”

“미안….”

“사과할 일은 아니지.”

칼같은 대답에 모험가의 꼬리 끄트머리가 직각으로 꺾이듯 휘었다. 파다닥 꼬리 끝이 흔들리고 침상 위로 축 늘어뜨린 모험가는 귀를 바짝 내리고서 눈치 보듯 재차 사과했다.

“미, 미안해.”

“왜? 넌 앞으로도 이럴 거고, 쭉 그럴 거잖아. 그때마다 매번 내가 널 봐줄 수는 없는 일이고.”

“….”

“속상해서 그랬어. 네게 강요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너도 네 몸을 소중히 여겨줬으면 좋겠다.”

“…노력해 볼게.”

기가 팍 죽어 귀와 꼬리가 늘어진 모험가의 등에 바짝 붕대를 감아둔 그라하가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르는 동안 바스락거리는 천 소리만 들렸다. 라하가 직접 셔츠를 다시 추켜 올리고 단추까지 채워주니 모험가는 눈 둘 곳을 찾지 못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시선을 외면하던 그라하가 나지막이 말했다.

“…미안해. 내가 할 말은 아니었던 거 같아.”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랬다. 몸을 험하게 쓰기로는 라하나 모험가나 거기서 거기 아닌가? 아주 조금 억울한 감이 있었지만, 당장 잘못한 것은 저이니 말을 아꼈을 뿐이다. ‘어쨌든 너도 알기는 아네?’ 하는 눈으로 쳐다보니 그라하가 헛웃음을 흘렸다. 실상 모험가가 잘못이라 생각하는 것은 다친 상태를 알리지 않고 전투한 사실보다 끝까지 숨기지 못하고 들킨 점이지만.

천천히 겉옷을 추스르는 모험가를 지켜보던 그라하가 목덜미와 머리를 한꺼번에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몸이 굳은 모험가가 한껏 부풀어 오른 꼬리를 세웠다. 그라하는 솜방망이처럼 커진 갈색 꼬리를 보다가 킥킥 웃었다.

“네가 멀쩡하지 못해도, 이렇게 돌아와서 다행이야…. ‘열쇠’가 너에게 있는 한 앞으로도 계속 노려질 텐데, 네게도 말 못 할 부담이 있겠지. 그 짐을 내게도 덜어줄 수 있다면 좋으련만…. 너는 도통 속내를 말하지 않으니까.”

“…그, 음.”

“네 곁에는 나도 있고, 쿠루루도 있고, 야슈톨라나 알리제, 아니더라도 정말 많은 사람이 있어. 혼자 짊어지지 않고 나눠 드는 법은… 진작부터 알고 있잖아. 그렇지?”

끌어안은 머리통이 품속에서 끄덕였다. 천천히 등으로 향하던 손이 방향을 틀어 어깨와 뒤통수를 쓸어내렸다. 토닥이듯 꽉 끌어안고 숨을 들이켠 그라하가 천천히 호흡을 뱉었다. 그가 고통만으로 현실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한다. 통증을 경감하기 위하여 그라하는 기꺼이 그의 완충제가 되어줄 수도 있었다. 다만, 그가 바라고 요청해야 가능한 일이다.

“날 불러줘. 언제나 기다리고 있어. 네가 돌아보지 않아도 찾을 수 있도록, 네 곁에 발을 맞추기 위해 노력해 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정도는 되는 것 같은데. 어때?”

“…그, 있잖아. 라하.”

“응?”

목소리가 꽉 막힌 듯한 모험가가 그라하의 팔뚝을 잡았다. 의아하게 고개를 숙이자 품에 안겨있던 모험가가 벌게진 얼굴로 눈을 피했다. 삐걱거리는 마법 인형처럼 그라하의 어깨를 잡아 미는 몸짓에서 어색함이 느껴졌다.

“아, 안은 게 아팠어?”

“아니, 그게 아니라….”

작게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위해 고개를 기울였던 그라하는 이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서로 눈을 피하고 천장과 바닥을 보다가 이마를 짚은 그라하가 똑같이 벌게진 얼굴로 물었다.

“…잠깐 툴라이욜라에 들를까. 여기서는 좀.”

너무 넓고 개방적이잖아. 뒤에 이어지지 않은 말을 예상한 듯 모험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텔레포를 탄 그라하가 어깨에 짐짝처럼 모험가를 들쳐맸다. 힘빠진 작대기 같은 마법사가 제 발로 걸어가는 것보다 그것이 더 빠르단 이유였다.

뱃머리 선실의 종업원인 볼우루크와 아모가 시선이 마주쳤다. 어깨에 반쯤 접혀서 들린 모험가가 허허실실 웃으며 손을 흔들자, 그가 어색하게 손을 마주 흔들어주었다.

종업원의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 : …모험가는 다 저렇게 괴짜인가?